와타에이 조각
와타루랑 에이치가 둘 다 이상한 와타에이
“와타루.”
와타루는 에이치의 부름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와 같은 웃음이 와타루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에이치는 그에 화답하듯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나와 함께 여행을 가자."
오늘은 기분이 좋거든. 그 한 마디로 텐쇼인 에이치는 지구 반대편 먼 나라에의 여행을 계획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소꿉친구가 항상 한숨을 쉬게 만드는 추진력에 아이 같은 천진한 공상을 현실로 이뤄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재력이 더해지면 기실 못 할 게 없음은 분명하다. 와타루는 순진한 척 눈웃음을 흘리는 에이치를 보면서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황제 폐하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그러나 왜인지 그 대답은 에이치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아주 잠깐 스쳐지나간 불쾌함이었지만 히비키 와타루의 시력으로는 충분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와타루는 굳이 에이치에게 그것을 되묻지 않았다. 대신 중세의 신사처럼 정중히 허리를 굽히고 그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에이치는 다시금 미소지으면서 그 위에 우아하게 제 손을 올렸다.
"공주님이 된 기분이네."
에이치가 가리켰던 잡지 안의 장소는 당연하게도 외국이었다. 그것도 지구를 반이나 빙 돌아야만 도달할 수 있는 장소였다. 에이치의 재력과 권력이 어떻든 간에, 단 한 차례도 전용기로 지구 반대편에 발을 내린 적이 없는 와타루는 AMAZING을 연발하며 꽃을 흩날렸다. 이질적인 내음새가 그를 간질였다. 에이치는 마치 아이의 재롱을 보듯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런 와타루를 바라보았다. 좋아할 줄 알았어. 에이치의 흐뭇한 목소리에 와타루는 더욱 더 전격적으로 비둘기들을 날렸다. 팡파레가 울렸다.
둘은 몇 시간에 불과한 여유 시간을 꽤 알뜰하게 써 먹었다. 드물게 컨디션이 좋은 에이치가 먼저 나서서 이곳저곳으로 와타루를 이끌었고, 와타루는 에이치가 원하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며 여행의 흥미를 북돋웠다. 둘은 버스를 타기도 하고 가끔은 택시를 잡아타며 이곳저곳 부지런히 움직였다.
"다음 앨범 자켓 사진은 여기서 찍을까봐."
"이런, 목적은 사전 조사였나요?"
"글쎄, 어떨까. 맞춰 볼래, 와타루?"
이국적인 아름다움은 아무래도 에이치를 단단히 매료시킨 모양이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궁전을 바라보며 에이치가 눈을 반짝였다. 그 눈에 고스란히 담긴 예술적인 흥분과 열정을 와타루는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다음 로케는 정말로 이 나라로 올 수도 있겠구나 싶은 느낌이 드는 건, 절대 착각은 아닐 것이다.
에이치가 마음에 들어 한 궁전은 둘의 짧은 여행 중 마지막 코스에 해당했다. 에이치는 끈덕지게 바라보던 궁전을 어쩔 수 없이 뒤로 하면서도 설레는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찬 바람에 밀랍처럼 희게 식어내렸던 얼굴에 미약하게나마 홍조가 돌았다.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시간이 부족해서 아쉽네. 그치만 그만큼 와타루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와타루는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하는구나.”
“황제 폐하를 즐겁게 하는 것은 광대의 본분, 그러니 당연한 일이지요! 에이치가 기쁘지 않았더라면 저는 슬퍼서 견딜 수 없었을 거랍니다!”
“후후, 와타루는 언제나 그런 말뿐이구나. 여행을 좀 더 즐겼다는 말을 했더라면 좋았을걸. 여행 시간이 너무 짧았던 걸까?”
“확실히 여행을 더 했더라면 폐하의 아쉬움은 덜했겠지요. 그랬다면 이 와타루도 폐하를 좀 더 기쁘게 할 수 있었을 테고, 그럼 저도 조금 더 기뻤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럼 그러자.”
“네?”
오늘따라 에이치는 변덕이 심했다. 자기주장도 평소보다 훨씬 강했다. 와타루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아침부터 부랴부랴 출발했는데도 도착한 시간은 꽤 늦었다. 당연하게도 주변을 돌아볼 시간은 얼마 없었고, 여행은 짧게 끝났다. 본래라면 1박만에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에이치가 억지를 부린 탓에 상황은 조금 더 느긋하게 돌아갔다. 일정 변경은 쉬웠다. 사전에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티켓을 취소하고 부산을 떨 것도 없이 교통수단이 에이치 본인의 전용기였던 영향이 컸다. 무엇보다 다음날은 주말이었다. 특기할 만한 스케줄도 전무했다. 병약한 에이치의 다음 일정은 짧은 일탈과 같은 여행이 끝나면 긴 비행의 후유증을 털어내기 위해서 유리관 속의 공주님처럼 깊은 잠에 드는 것뿐이었다.
와타루는 조금 어색한 기분으로 말 한 마디로 일정을 뒤바꾸는 황제의 만행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미안, 와타루. 기다렸지?”
에이치는 통보하듯이 본가에 전화를 끝내고 돌아서서 와타루를 향해 웃었다.
(중략)
“가끔 이렇게 생각해. 영원히 빛날 것 같은 저 별에 내 이름을 붙인다면, 그렇다면 언젠가 와타루가 살아가면서 하늘을 올려다 볼 때마다, 저 별이 빛날 때마다 나를 떠올려 주지 않을까.”
“놀라운 발상이로군요! 하지만 황제 폐하, 간과하신 게 있답니다. 별은 영원하지 않아요. 그 빛도, 아름다움도 모든 것이 말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요. 그렇기에 아름다운 거랍니다!”
에이치는 크게 웃었다. 왜인지 따라 웃을 분위기가 아니라서 와타루는 희극적인 미소를 띤 얼굴 그대로 에이치를 바라보면서 반쯤 굳어 있었다. 한참을 웃던 에이치는 웃음기가 남아 예쁘게 휜 눈으로 와타루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새벽빛과 같은 색이었나, 찰나의 순간 지나가고 마는 그 덧없는 빛과 닮아 있었나...
“낭만이 없구나, 와타루.”
“이런! 이 히비키 와타루, 언제나 사랑과 낭만을 좇는 자랍니다. 폐하께 그렇게 보였다면 그야말로 유감이로군요. 아아, 이렇게 슬플 데가!”
언제나와 같이 과장된 연극조의 언어가 쏟아져 나왔다. 말이라기보다는 대사에 가까운, 그 문장을 토해내는 와타루의 입매가 조금 일그러져 있음은 와타루 본인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별은 나보다는 오래 남아있지 않을까? 아마 내가 죽어도, 와타루가 사라져도, 어쩌면 적어도 와타루가 나를 잊을 때까지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거야.”
(중략)
“너를 사랑하고 있어, 나의 와타루.”
히비키 와타루는 그 순간 가면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에이치는 언젠가 와타루가 그랬듯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거짓 웃음을 지으면서 와타루의 뺨을 천천히 손으로 감쌌다.
“놀랐니?”
에이치는 그 한 마디로 허공을 유영하던 와타루의 정신에 찬 물을 들이부었다. 와타루가 갑작스레 혼란에서 깨어났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깨어진 가면을 허겁지겁 주워 들고 평소처럼 웃었다.
“AMAZING!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황제 폐하! 당신은 언제나 절 놀라게 하는군요. 맞습니다, 전 황제 폐하의 기행에 오늘 겪었던 어떤 일보다도 놀라고 말았답니다!”
하지만 비둘기는 날개를 푸드덕대며 날아가는 게 아니라 와타루의 주변에서 작은 머리를 움직이고만 있었다. 장미꽃 잎들도 폭죽처럼 터져야 했는데 반쯤 터지다 말아서 에이치가 장미꽃 잎을 온통 뒤집어쓰고 말았다. 와타루의 가면 조각들은 다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평소답지 않은 그의 실책을 본 에이치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치의 몸이 잘게 떨리자 그의 온 몸에 붙어 있던 붉은 꽃잎들이 하늘하늘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붉은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아아, 맞아. 와타루가 이렇게 놀라는 걸 보는 건 서커스 때 이후로 처음이네. 언제나 날 놀라게 하는 건 와타루였는데, 와타루를 놀라게 하는 것도 꽤 재미있는 것 같아. 와타루는 이런 기분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