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수로 약 4~5년 전(2012년~2013년 정도?)에 구상한 이야기이므로, 최근 연재분에서 보인 크라피카의 행보(십이지에 들어갔다거나 노스트라드의 보스가 되었다거나), 혹은 암흑대륙에 관련된 네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패러렐로 봐 주세요.
* 고래섬이나 파도키아 공화국의 성년 등의 자잘한 설정은 원작에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임의로 설정한 경우가 많습니다.
recall
레오리오는 오늘로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 밤이 꽤 깊었지만, 의사인 레오리오의 퇴근 시간은 항상 늦었으므로 그 둘은 레오리오의 집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느지막이 출발하곤 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벌써 몇 번째나 돌아왔던 생일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곤은 조금 들뜬 것 같아서 키르아는 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뭐가 그렇게 좋냐? 그렇게 넌지시 묻자 곤이 씨익 웃었다. 오늘이 열 번째잖아! 답은 돌아왔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의문스런 표정을 짓자 곤이 다시 대답했다.
“레오리오랑 친구로 같이 보내는 생일 말이야!”
곤은 쓸데없는 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었다. 키르아는 곤의 말을 듣고도 열 번째라는 숫자에 딱히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앞으로 약 네 달 뒤에 돌아올 그 자신의 생일이 친구가 생긴 뒤로 맞는 열 번째 생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자 얼핏 그런가보다 싶기도 했다. 곤은 곧 기대감에 찬 얼굴로 그래서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며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아무도 그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키르아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고 싶지 않았다.
그 특별한 선물이 무엇이었는지는 둘이 뻔하디 뻔한 레퍼토리로 집 안에 숨고, 이미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을 레오리오가 살그머니 문을 열었을 때 알 수 있었다. 곤은 레오리오의 기척을 눈치채자마자 부리나케 현관 앞으로 달려가 불을 켜지도 않고 선물부터 들이밀었다. 눈 앞까지 쑥 올라온 선물을 보고 소리를 지를 뻔 했던 레오리오는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는 대신에 곤의 머리에 보기 좋게 꿀밤을 먹여 주었다.
“요 녀석이, 내가 올 걸 다 알고 있으면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곤이 쓸데없는 곳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면, 레오리오는 벌써 스무 살도 넘은 둘을 어린아이 대하듯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맨 처음 서로를 만났을 때부터 자리를 잡은 버릇이었다. 그때 둘은 고작 열 두살의 어린아이였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키르아는 그때조차 자기 자신이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레오리오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제 둘은 성인이었다. 그것도 스물 둘이나 된 나이였다. 18세부터 성인으로 인정받는 파도키아 공화국의 법에 따르자면 키르아는 벌써 성인이 된 지 4년이나 지난 셈이다.
레오리오가 나고 자란 나라는 열 두살부터 알콜을 허용했고, 곤이 자란 고래섬은 그다지 정해진 규율 같은 것이 없었다. 유일하게 나이가 걸리는 것은 키르아 뿐이었다. 물론이지만 그 전에 술을 마신 적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레오리오가 일 년 남짓 사귄 여자친구에게 차인 날은 다같이 모여서 아침까지 그의 한탄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기도 했고,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냉장고에 있던 술을 음료수로 알고 병째로 들이킨 곤을 수습해야 했던 날도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열 여덟이 되어서야 키르아가 적법하게 음주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므로, 그 때부터 셋은 모이는 자리에서 종종 술을 마시곤 했다.
그리고 생일은 아주 좋은 핑계거리에 속했다. 레오리오가 검은 봉지에서 술을 꺼내 보이자 곤이 소리쳤다. 우리도 사 왔는데! 그러나 곤도 키르아도 보통의 스물 두살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튼튼했고, 레오리오 역시 꽤 주당이었으므로 곧 셋은 더 다투거나 할 것 없이 술판을 벌렸다.
적당히 취기가 돌자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눈가가 취기로 발갛게 물든 곤이 뭐라고 하면 레오리오가 낄낄댔고, 레오리오가 뭐라고 하면 곤이 뒤로 넘어갔다. 키르아가 곤의 등을 퍽퍽 치자 곤이 따라서 레오리오의 등을 치는 바람에 레오리오가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우물대던 레오리오가 곧 서른이란 말이야! 하고 빼액 소리를 지르자 곤이 그 말을 받는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불그스레한 얼굴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른 살 같았다느니 하면서 위로인지 놀림인지 모를 말을 주워섬겼다. 키르아가 곤에게 술을 한 잔 더 따라 주며 낄낄댔다.
곤의 그 말을 기점으로 셋은 추억을 하나둘 꺼내들기 시작했다. 처음 서로를 마주했던 헌터 시험, 그리고 그 무렵의 서로에 대해, 한 마디 꺼낼 때마다 당사자가 손사래를 치는 것이 우스워서 나머지 둘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한 마디 두 마디 더 꺼내들었다. 함께하지 않았던 각자의 이야기와 소소한 모험담에 대해, 목숨을 내놓고 뛰어들었던 비오는 여름밤의 이야기에 대해, 그리고 잠시간 침묵의 꼬리를 물고 다시 그리드 아일랜드에서의 긴 모험담이 이어졌다.
밤 늦도록 이어진 술판에서 살아남은 것은 키르아 혼자였다. 그것도 잠깐 필름이 끊겼다가 다시 깨어난 참이었다. 부어라 마셔라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튼튼하기론 이길 자가 드문 조르딕의 신체로도 버틸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레오리오는 팔다리를 제멋대로 벌린 채 곯아떨어져 있었다. 마침 그 옆에 술병이 몇 개 뒹굴고 있길래 키르아는 유리병을 하나 집어들었다. 기가 찼다. 수집벽이 있는 아버지 덕에 알콜에 해박한 그가 알고 있는 술 가운데서도 단연 도수가 높기로 유명한 술이었다. 정리한다 치고 다른 병들도 하나하나 주워 보니 전부 그 정도거나 아니면 더 독한 술들 뿐이었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그 출처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이런 걸 밤새 마셔댔으니 아무리 주당이라도 나가떨어질 수밖에.
이건 뭐 마시다 죽자는 건지, 하고 혀를 찬 키르아는 곤과 레오리오를 한 구석에 밀어 두려고 했다. 그런데 레오리오를 막 밀자마자 언제 꺼낸 건지 모를 앨범이 술에 쩐 레오리오의 몸 아래에서 드러났다. 앨범은 다행히도 멀쩡했다. 방패막이가 되어 준 레오리오의 몸 덕분에 난장판이 된 거실에서도 별다른 해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앨범을 집어든 키르아는 간밤에 이어졌던 추억 이야기를 떠올렸다. 평생 집안에 목이 매여 암살이나 하다 죽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키르아는 십여 년간 친구들과 이렇게 많은 추억들을 만들었다. 인형이 인간이 되어 살아왔다. 키르아는 앨범을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앨범이 뒤로 넘어갈수록 가슴 한켠이 따뜻해졌다. 한겨울 바깥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난방이 도는 방 안에 들어온 것처럼, 손끝부터 시작해 온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느새 오른손에 집힌 앨범은 많이 얇아져 있었다. 이제 몇 장만 넘기면 끝이었다. 그때 기습처럼 낯익은 얼굴이 셋 사이에 끼어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오래 간직했던지라 조금 빛바랜 사진 안에서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구름 사이를 틈타고 어둠을 걷고 막 거실에 비쳐 들어오기 시작한 햇살처럼 화사한 머리카락과, 예쁘게 휜 눈꺼풀에 반쯤 가려졌어도 여전히 선명한 초록색 눈이 무채색의 셋 사이에서 눈길을 사로잡았다. 앳된 얼굴,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인 넷 중에서 십 년 전에 오롯이 남은 단 한 사람. 참 오랜만에 기억난 이름이었고 얼굴이었다. 날 잊고 있었지. 그림처럼 웃고 있는 친구는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키르아는 명치 끝을 찔린 것처럼 몸을 약간 수그렸다. 스물일곱의 크라피카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열여덟 살의 크라피카는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희미한 기억 속에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서른을 앞둔 크라피카는 마치 이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 같았다. 키르아에게 있어 크라피카는 그저 추억 속의 사람으로만 남아 있어야 하는 것 같았다. 십 년이나 지났잖아. 당연한 거잖아. 내 의도가 아니었어. 움직이지 않는 친구의 눈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 변명을 들어 줄 친구는 이미 키르아의 세계에서 사라진 지 오래라는 것을 깨달았다.
멍청한 짓을 했네. 그걸 깨닫고 나니 난장판이 된 거실의 윤곽이 좀 더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해가 밝아 오고 있었다. 아마 취기가 돌아서 그랬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답지 않게도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키르아는 감은 눈 밑을 꾹꾹 누르고 다시 정리를 시작했다.
* * *
프롤로그 같은 느낌이었는데 제가 탈덕했기 때문에 재입덕하지 않는 이상 뒷이야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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