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kc7744.postype.com/post/910438


2017 1월 헌터온리에 냈던 글회지입니다.


약 7만자, A5 기준 120p입니다. 재판 예정 없습니다. 통판 예정 없었지만 재고는 있으니 종이책 원하시면 트위터 @Y3S_1_10V3Y0U 디엠 혹은 이 포스팅 댓글로 문의주세요.


근미래 배경으로, 키르아의 나이가 조정되어 있습니다.


같이 냈던 <오래된 이야기>는 저 스스로 우울을 너무 가볍고 잘못되게 다루었다는 판단이 들어 이후 공개, 판매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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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타니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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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페스 와타루

2018. 3. 7. 01:52 from 그림

 

내가 이걸 여기서 더 그릴까 정답은 NO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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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타니님 :

화남금녀

2018. 3. 7. 01:44 from 그림

자캐입니다 양마리입니다

캐숨했었습니다

 

 

 

 

 

 

캐숨용 그림체

화남금녀 재밌게 뛰었습니다 오랜만에 그림도 많이 그림 사실 러닝 끝나고 나서 더 많이 그렸다

사실(2) 다른사람 캐를 더 많이 그린 것 같은데 안올려서 적어보임

 

 

 

 

 

어 잠깐 지금 발견했는데 눈색틀렸잖아

 

 

 

 

 

 

우명쌤 사랑해요

 

 

 

 

이건 트위터 해시 했던 결과물이다

1) 마리가 우보긴(헌터헌터)의 옷을 입고 에이치님(앙스타)의 대사를 한다

2) 마리가 히소카(헌터헌터)의 옷을 입고 엘키두(페이트)의 대사를 한다

 

 

 

 

 

 

마리스크림

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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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타니님 :

키르크라 / curtain call

2017. 8. 24. 04:29 from

* 햇수로 약 4~5년 전(2012년~2013년 정도?)에 구상한 이야기이므로, 최근 연재분에서 보인 크라피카의 행보(십이지에 들어갔다거나 노스트라드의 보스가 되었다거나), 혹은 암흑대륙에 관련된 네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패러렐로 봐 주세요.

* 고래섬이나 파도키아 공화국의 성년 등의 자잘한 설정은 원작에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임의로 설정한 경우가 많습니다.



recall


레오리오는 오늘로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 밤이 꽤 깊었지만, 의사인 레오리오의 퇴근 시간은 항상 늦었으므로 그 둘은 레오리오의 집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느지막이 출발하곤 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벌써 몇 번째나 돌아왔던 생일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곤은 조금 들뜬 것 같아서 키르아는 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뭐가 그렇게 좋냐? 그렇게 넌지시 묻자 곤이 씨익 웃었다. 오늘이 열 번째잖아! 답은 돌아왔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의문스런 표정을 짓자 곤이 다시 대답했다.


“레오리오랑 친구로 같이 보내는 생일 말이야!”


곤은 쓸데없는 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었다. 키르아는 곤의 말을 듣고도 열 번째라는 숫자에 딱히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앞으로 약 네 달 뒤에 돌아올 그 자신의 생일이 친구가 생긴 뒤로 맞는 열 번째 생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자 얼핏 그런가보다 싶기도 했다. 곤은 곧 기대감에 찬 얼굴로 그래서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며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아무도 그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키르아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고 싶지 않았다.


그 특별한 선물이 무엇이었는지는 둘이 뻔하디 뻔한 레퍼토리로 집 안에 숨고, 이미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을 레오리오가 살그머니 문을 열었을 때 알 수 있었다. 곤은 레오리오의 기척을 눈치채자마자 부리나케 현관 앞으로 달려가 불을 켜지도 않고 선물부터 들이밀었다. 눈 앞까지 쑥 올라온 선물을 보고 소리를 지를 뻔 했던 레오리오는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는 대신에 곤의 머리에 보기 좋게 꿀밤을 먹여 주었다.


“요 녀석이, 내가 올 걸 다 알고 있으면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곤이 쓸데없는 곳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면, 레오리오는 벌써 스무 살도 넘은 둘을 어린아이 대하듯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맨 처음 서로를 만났을 때부터 자리를 잡은 버릇이었다. 그때 둘은 고작 열 두살의 어린아이였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키르아는 그때조차 자기 자신이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레오리오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제 둘은 성인이었다. 그것도 스물 둘이나 된 나이였다. 18세부터 성인으로 인정받는 파도키아 공화국의 법에 따르자면 키르아는 벌써 성인이 된 지 4년이나 지난 셈이다.


레오리오가 나고 자란 나라는 열 두살부터 알콜을 허용했고, 곤이 자란 고래섬은 그다지 정해진 규율 같은 것이 없었다. 유일하게 나이가 걸리는 것은 키르아 뿐이었다. 물론이지만 그 전에 술을 마신 적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레오리오가 일 년 남짓 사귄 여자친구에게 차인 날은 다같이 모여서 아침까지 그의 한탄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기도 했고,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냉장고에 있던 술을 음료수로 알고 병째로 들이킨 곤을 수습해야 했던 날도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열 여덟이 되어서야 키르아가 적법하게 음주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므로, 그 때부터 셋은 모이는 자리에서 종종 술을 마시곤 했다.


그리고 생일은 아주 좋은 핑계거리에 속했다. 레오리오가 검은 봉지에서 술을 꺼내 보이자 곤이 소리쳤다. 우리도 사 왔는데! 그러나 곤도 키르아도 보통의 스물 두살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튼튼했고, 레오리오 역시 꽤 주당이었으므로 곧 셋은 더 다투거나 할 것 없이 술판을 벌렸다.


적당히 취기가 돌자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눈가가 취기로 발갛게 물든 곤이 뭐라고 하면 레오리오가 낄낄댔고, 레오리오가 뭐라고 하면 곤이 뒤로 넘어갔다. 키르아가 곤의 등을 퍽퍽 치자 곤이 따라서 레오리오의 등을 치는 바람에 레오리오가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우물대던 레오리오가 곧 서른이란 말이야! 하고 빼액 소리를 지르자 곤이 그 말을 받는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불그스레한 얼굴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른 살 같았다느니 하면서 위로인지 놀림인지 모를 말을 주워섬겼다. 키르아가 곤에게 술을 한 잔 더 따라 주며 낄낄댔다.


곤의 그 말을 기점으로 셋은 추억을 하나둘 꺼내들기 시작했다. 처음 서로를 마주했던 헌터 시험, 그리고 그 무렵의 서로에 대해, 한 마디 꺼낼 때마다 당사자가 손사래를 치는 것이 우스워서 나머지 둘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한 마디 두 마디 더 꺼내들었다. 함께하지 않았던 각자의 이야기와 소소한 모험담에 대해, 목숨을 내놓고 뛰어들었던 비오는 여름밤의 이야기에 대해, 그리고 잠시간 침묵의 꼬리를 물고 다시 그리드 아일랜드에서의 긴 모험담이 이어졌다.


밤 늦도록 이어진 술판에서 살아남은 것은 키르아 혼자였다. 그것도 잠깐 필름이 끊겼다가 다시 깨어난 참이었다. 부어라 마셔라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튼튼하기론 이길 자가 드문 조르딕의 신체로도 버틸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레오리오는 팔다리를 제멋대로 벌린 채 곯아떨어져 있었다. 마침 그 옆에 술병이 몇 개 뒹굴고 있길래 키르아는 유리병을 하나 집어들었다. 기가 찼다. 수집벽이 있는 아버지 덕에 알콜에 해박한 그가 알고 있는 술 가운데서도 단연 도수가 높기로 유명한 술이었다. 정리한다 치고 다른 병들도 하나하나 주워 보니 전부 그 정도거나 아니면 더 독한 술들 뿐이었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그 출처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이런 걸 밤새 마셔댔으니 아무리 주당이라도 나가떨어질 수밖에.


이건 뭐 마시다 죽자는 건지, 하고 혀를 찬 키르아는 곤과 레오리오를 한 구석에 밀어 두려고 했다. 그런데 레오리오를 막 밀자마자 언제 꺼낸 건지 모를 앨범이 술에 쩐 레오리오의 몸 아래에서 드러났다. 앨범은 다행히도 멀쩡했다. 방패막이가 되어 준 레오리오의 몸 덕분에 난장판이 된 거실에서도 별다른 해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앨범을 집어든 키르아는 간밤에 이어졌던 추억 이야기를 떠올렸다. 평생 집안에 목이 매여 암살이나 하다 죽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키르아는 십여 년간 친구들과 이렇게 많은 추억들을 만들었다. 인형이 인간이 되어 살아왔다. 키르아는 앨범을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앨범이 뒤로 넘어갈수록 가슴 한켠이 따뜻해졌다. 한겨울 바깥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난방이 도는 방 안에 들어온 것처럼, 손끝부터 시작해 온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느새 오른손에 집힌 앨범은 많이 얇아져 있었다. 이제 몇 장만 넘기면 끝이었다. 그때 기습처럼 낯익은 얼굴이 셋 사이에 끼어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오래 간직했던지라 조금 빛바랜 사진 안에서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구름 사이를 틈타고 어둠을 걷고 막 거실에 비쳐 들어오기 시작한 햇살처럼 화사한 머리카락과, 예쁘게 휜 눈꺼풀에 반쯤 가려졌어도 여전히 선명한 초록색 눈이 무채색의 셋 사이에서 눈길을 사로잡았다. 앳된 얼굴,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인 넷 중에서 십 년 전에 오롯이 남은 단 한 사람. 참 오랜만에 기억난 이름이었고 얼굴이었다. 날 잊고 있었지. 그림처럼 웃고 있는 친구는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키르아는 명치 끝을 찔린 것처럼 몸을 약간 수그렸다. 스물일곱의 크라피카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열여덟 살의 크라피카는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희미한 기억 속에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서른을 앞둔 크라피카는 마치 이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 같았다. 키르아에게 있어 크라피카는 그저 추억 속의 사람으로만 남아 있어야 하는 것 같았다. 십 년이나 지났잖아. 당연한 거잖아. 내 의도가 아니었어. 움직이지 않는 친구의 눈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 변명을 들어 줄 친구는 이미 키르아의 세계에서 사라진 지 오래라는 것을 깨달았다.


멍청한 짓을 했네. 그걸 깨닫고 나니 난장판이 된 거실의 윤곽이 좀 더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해가 밝아 오고 있었다. 아마 취기가 돌아서 그랬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답지 않게도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키르아는 감은 눈 밑을 꾹꾹 누르고 다시 정리를 시작했다.



* * *


프롤로그 같은 느낌이었는데 제가 탈덕했기 때문에 재입덕하지 않는 이상 뒷이야기는 없습니다


Posted by 타니님 :

키르크라 / 넥타이

2017. 8. 24. 04:01 from

빨리 나오라는 레오리오의 구박을 한번 듣고 나서야 장난질에 열중하던 두 꼬맹이의 손이 조금이나마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직 정장은 세 번밖에 입어본 기록이 없는 곤의 손이 조금 더 느렸다. 이제 넥타이만을 남겨두고 있는 키르아는 곤을 흘끗 곁눈질했다. 곤은 그제서야 재킷을 집어들고 있었다. 조금 그 쪽을 방황하던 시선이 옆쪽으로 향했다. 크라피카는 어느 샌지 넥타이까지 빈틈없이 다 매고 정리에 분주했다. 이번에는 제 손에 쥔 넥타이로 시선이 간다.

 

키르아는 고민하고 있었다. 짜증지수를 몇 단계나 올려놓을 답답함에도 불구하고 넥타이를 맬 것인가. 물론 속마음으로만 따지면 넥타이따위 이미 저 멀리 던져버리고 방을 나가 레오리오를 반쯤 놀리며 스트레스를 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런 자리는 격식이 중요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들었던 터다. 아마 레오리오뿐만 아니라 크라피카나 비스케조차도 탐탁찮게 볼 것임이 분명했다.

 

결국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곤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역시나, 하고 키르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키르아는 집안이 집안인지라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았던 반면, 곤은 정장이라는 것은 G.I에서 처음 접해 본 시골 중의 시골 소년이었다. 그 이후 두어 번 더 정장을 입을 일이 있었으나, 그 때마다 곤은 꼭 넥타이를 매지 못해 쩔쩔매며 애를 썼다. 물론 키르아는 그 때마다 넥타이를 매는 법을 설명해 가며 넥타이를 매 주곤 했지만, 그 결과는 지금 그의 눈 앞에 놓인 것처럼 시작도 못 하고 울상을 짓는 곤이 되곤 하는 것이다.

 

키르아는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발걸음을 뗐다. 다시금 곤이 넥타이를 매는 것을 돕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조금 더 빠른 이가 있었다.

 

 

“처음은 이렇게.”

 

 

크라피카는 아주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천천히 곤의 목에 넥타이를 둘렀다. 그리고는 곤과 눈을 한 번 맞췄다. 곤이 아직은 조금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피카는 그것을 확인한 후에 다시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이 다음은 여기에 이걸 겹치는 거야. 거리가 있어서인지 얼핏 속삭이는 듯 들리는 목소리는 여느 때 자신들을 대하는 그가 언제나 그렇듯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성인 남성답게 두껍고 약간은 거치른 레오리오의 목소리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어투가 다른 탓일까. 하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근본적인 문제 같기도 하다고 키르아는 생각했다.

 

키르아가 하던 것보다 훨씬 천천히, 하지만 세세하고 그만큼 확실하게. 크라피카의 설명은 키르아가 설명하는 두 배는 되어서야 반쯤 단계가 넘어갔다. 키르아는 그것을 보면서 왜 곤이 자신의 설명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키르아 자신은 넥타이 매는 법을 이미 능숙하다고 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곤은 완전히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르아는 곤이 제대로 알아듣기에는 너무 설명이 빠르게, 또 넥타이를 이리저리 넘기는 과정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진행했다. 하지만 키르아는 그 판단 끝에 지기 싫은 치기를 덧붙였다. 이건 몇 번을 설명해 줘도 안 되는 머리 나쁜 곤 탓도 있기는 하니까.

 

이제 곤의 넥타이는 거의 모양을 완성했다. 크라피카는 맨 마지막으로 곤의 손에 넥타이 끝 부분을 들려 주었다. 한번 당겨 볼래? 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긴장한 듯한 표정까지 지어 보이며 넥타이를 당겼다. 우와, 하고 곤이 탄성을 내질렀다. 내가 저걸 몇 번이나 해 줬는데. 키르아는 속으로 조금 불평하면서도 곤의 넥타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제 손에 여전히 힘없이 들린 넥타이를 바라보았다. 다시 곤을 한 번, 그리고 넥타이를 한 번, 마지막으로 크라피카를 한 번 바라본다.

 

 

“나도! ……이거…, 매줘.”

 

 

키르아가 간신히 꺼낸 말 끝이 거북이 머리마냥 기어들어갔다. 부탁을 한다는 부끄러움에 더해, 이미 제가 넥타이를 아주 잘 맨다는 것을 아는 곤이 키르아 쪽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기 때문이었다. 모르는 척 고개를 팩 돌려 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다.

 

크라피카는 제 멋대로 그것을 자신에게 부탁해야 하는 불만 정도로 해석했다. 본디 키르아는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곤 했다. 거기에다 키르아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이런 소소한 것이라는 사실까지 합쳐지면 충분히 불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직 어리구나 싶어 설핏 입가가 올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크라피카는 키르아의 넥타이를 받아들어 그의 목에 둘렀다. 곤에게 설명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그가 넥타이를 매는 법을 확실히 보고 익힐 수 있도록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손가락이 길구나. 그게 키르아의 첫 감상이었다. 어차피 넥타이 매는 법은 들을 필요도 없으니 집중하기 시작한 곳은 손밖에는 없었다. 눈을 들었을 때는 키르아가 이 쪽을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어서 도리어 크라피카 쪽이 조금 놀라 고개를 빠르게 숙였다. 그 뒤 바로 이어진 감상은 조금 더 마른 것 같다, 정도다. 조금 전 힐끗 보였던 크라피카의 얼굴 역시 예전보다 훨씬 핼쓱해져 있던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오른쪽으로 조금 도는 손등에 뼈가 도드라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니 그 가설이 확실시된다. 그래도 그게 또 보기 싫지는 않았다. 도리어 예쁜 손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지. 순간 키르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렇잖아도 부끄러움으로 열기가 남아 있던 차에 그러니 이제는 귓불뿐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가 숫제 화덕마냥 뜨겁게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처음 이쪽을 본 이후로 크라피카가 얼굴을 들려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키르아는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만약 눈이 마주친다면, 하고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에 시간이 훅 지나갔다. 크라피카는 이전에 곤에게 했던 것처럼 키르아의 손에 넥타이 끝을 들려 주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적당히 넥타이 끝을 당기고 나서 다 끝났어, 하고 말해 주었다.

 

키르아는 크라피카가 돌아서자마자 괜시리 제 넥타이 끝을 조금 당겨 보았다. 목이 그만큼 약간 죈다. 조금 간지러운 듯도 하다. 그래서 이번엔 당기지 않고 조금 만지작거려도 본다. 새삼스럽게 항상 매던 넥타이가 낯설었다.

 

곤이 쪼르르 이 쪽으로 다가온다. 다시 들어온 레오리오를 타박하기 시작하는 크라피카의 눈치를 살금살금 보는 것이 무슨 말을 할 작정인지 키르아는 다 알 것만 같다.

 

 

“키르아 넥타이 맬 줄 알잖아?”

 

* * *

 

그리고 키르아는 곤에게 조용히 닥쳐...하고 속삭여 줬다고 한다(아님

Posted by 타니님 :

샴푸 냄새는 아니고, 그렇다고 시키쨩네 집 냄새도 아니고. 아, 향수 냄새구나. 시키쨩네 집 선반에서 보았던 반투명한 분홍색 용기가 떠올랐다. 잠에서 덜 깬 사고를 느릿하게 진행시키며 프레데리카는 시키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키쨩은 머리카락이 길다. 세간에서 말하는 여성스러운 이미지라거나, 그런 건 부럽지 않지만 향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는 건 부러울지도. 어떤 의미로는 시키쨩답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프레데리카는 조금 더 그 긴 갈색 머리카락에 코를 파묻었다. 불편한지 시키가 조금 꿈틀거리면서 침대 시트로 파고들었다. 조금은 불만스러운 잠꼬대도 들렸다. 하릴없이 프레데리카는 예이예이, 하면서 시키의 머리카락을 조금 놓아 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시키쨩의 머리카락이 물 흐르듯 빠져나간다.


시키쨩도 참 미인이지? 누구에게 전하는 것일지 모를 말을 하면서 프레데리카는 시키의 뺨을 침범한 머리카락을 살살 걷어냈다. 몸을 반쯤 일으키고 보니 살짝 찌푸려졌던 시키의 미간도 표정도 그제야 편하게 풀어진 것 같다. 편하게, 응. 이제 좋은 꿈만 꾸면 좋을 텐데.


하지만 프레데리카의 바람을 비웃듯이, 새벽을 걷어내기 시작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고 있었다. 프레데리카는 커튼을 칠까 말까 고민하다가 이 집 창문에는 예쁜 분홍색 커튼 같은 건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다음에 놀러올 때는 시키쨩에게 레이스와 리본이 달린 커튼을 선물하는 것도 좋겠다. 아니, 역시 둘이 같이 고르러 가는 게 좋을까? 변장만 제대로 한다면 아이돌이라고 알아보는 사람도 없지 않을까. 분홍색 커튼, 시키쨩에게 잘 어울릴 거야. 태평한 생각을 하며 프레데리카는 옅게 미소지었다. 한낮처럼 참 평온한 미소였다.


* * *


리퀘박스 플님 리퀘 / 시키프레, 시키 자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프레데리카

프레쨩의 집에는 예쁜 분홍색 커튼이 달려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습관대로 시키 자는 걸 바라보는 >크라피카<라고 치려다가 멈칫함...난데없는 크로스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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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타니님 :

와타에이 조각

2017. 8. 24. 03:56 from

와타루랑 에이치가 둘 다 이상한 와타에이



“와타루.”


와타루는 에이치의 부름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와 같은 웃음이 와타루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에이치는 그에 화답하듯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나와 함께 여행을 가자."


오늘은 기분이 좋거든. 그 한 마디로 텐쇼인 에이치는 지구 반대편 먼 나라에의 여행을 계획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소꿉친구가 항상 한숨을 쉬게 만드는 추진력에 아이 같은 천진한 공상을 현실로 이뤄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재력이 더해지면 기실 못 할 게 없음은 분명하다. 와타루는 순진한 척 눈웃음을 흘리는 에이치를 보면서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황제 폐하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그러나 왜인지 그 대답은 에이치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아주 잠깐 스쳐지나간 불쾌함이었지만 히비키 와타루의 시력으로는 충분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와타루는 굳이 에이치에게 그것을 되묻지 않았다. 대신 중세의 신사처럼 정중히 허리를 굽히고 그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에이치는 다시금 미소지으면서 그 위에 우아하게 제 손을 올렸다.


"공주님이 된 기분이네."


에이치가 가리켰던 잡지 안의 장소는 당연하게도 외국이었다. 그것도 지구를 반이나 빙 돌아야만 도달할 수 있는 장소였다. 에이치의 재력과 권력이 어떻든 간에, 단 한 차례도 전용기로 지구 반대편에 발을 내린 적이 없는 와타루는 AMAZING을 연발하며 꽃을 흩날렸다. 이질적인 내음새가 그를 간질였다. 에이치는 마치 아이의 재롱을 보듯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런 와타루를 바라보았다. 좋아할 줄 알았어. 에이치의 흐뭇한 목소리에 와타루는 더욱 더 전격적으로 비둘기들을 날렸다. 팡파레가 울렸다.


둘은 몇 시간에 불과한 여유 시간을 꽤 알뜰하게 써 먹었다. 드물게 컨디션이 좋은 에이치가 먼저 나서서 이곳저곳으로 와타루를 이끌었고, 와타루는 에이치가 원하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며 여행의 흥미를 북돋웠다. 둘은 버스를 타기도 하고 가끔은 택시를 잡아타며 이곳저곳 부지런히 움직였다. 


"다음 앨범 자켓 사진은 여기서 찍을까봐."

"이런, 목적은 사전 조사였나요?"

"글쎄, 어떨까. 맞춰 볼래, 와타루?"


이국적인 아름다움은 아무래도 에이치를 단단히 매료시킨 모양이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궁전을 바라보며 에이치가 눈을 반짝였다. 그 눈에 고스란히 담긴 예술적인 흥분과 열정을 와타루는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다음 로케는 정말로 이 나라로 올 수도 있겠구나 싶은 느낌이 드는 건, 절대 착각은 아닐 것이다.


에이치가 마음에 들어 한 궁전은 둘의 짧은 여행 중 마지막 코스에 해당했다. 에이치는 끈덕지게 바라보던 궁전을 어쩔 수 없이 뒤로 하면서도 설레는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찬 바람에 밀랍처럼 희게 식어내렸던 얼굴에 미약하게나마 홍조가 돌았다.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시간이 부족해서 아쉽네. 그치만 그만큼 와타루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와타루는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하는구나.”

“황제 폐하를 즐겁게 하는 것은 광대의 본분, 그러니 당연한 일이지요! 에이치가 기쁘지 않았더라면 저는 슬퍼서 견딜 수 없었을 거랍니다!”

“후후, 와타루는 언제나 그런 말뿐이구나. 여행을 좀 더 즐겼다는 말을 했더라면 좋았을걸. 여행 시간이 너무 짧았던 걸까?”

“확실히 여행을 더 했더라면 폐하의 아쉬움은 덜했겠지요. 그랬다면 이 와타루도 폐하를 좀 더 기쁘게 할 수 있었을 테고, 그럼 저도 조금 더 기뻤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럼 그러자.”

“네?”


오늘따라 에이치는 변덕이 심했다. 자기주장도 평소보다 훨씬 강했다. 와타루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아침부터 부랴부랴 출발했는데도 도착한 시간은 꽤 늦었다. 당연하게도 주변을 돌아볼 시간은 얼마 없었고, 여행은 짧게 끝났다. 본래라면 1박만에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에이치가 억지를 부린 탓에 상황은 조금 더 느긋하게 돌아갔다. 일정 변경은 쉬웠다. 사전에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티켓을 취소하고 부산을 떨 것도 없이 교통수단이 에이치 본인의 전용기였던 영향이 컸다. 무엇보다 다음날은 주말이었다. 특기할 만한 스케줄도 전무했다. 병약한 에이치의 다음 일정은 짧은 일탈과 같은 여행이 끝나면 긴 비행의 후유증을 털어내기 위해서 유리관 속의 공주님처럼 깊은 잠에 드는 것뿐이었다.

와타루는 조금 어색한 기분으로 말 한 마디로 일정을 뒤바꾸는 황제의 만행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미안, 와타루. 기다렸지?”


에이치는 통보하듯이 본가에 전화를 끝내고 돌아서서 와타루를 향해 웃었다.



(중략)



“가끔 이렇게 생각해. 영원히 빛날 것 같은 저 별에 내 이름을 붙인다면, 그렇다면 언젠가 와타루가 살아가면서 하늘을 올려다 볼 때마다, 저 별이 빛날 때마다 나를 떠올려 주지 않을까.”


“놀라운 발상이로군요! 하지만 황제 폐하, 간과하신 게 있답니다. 별은 영원하지 않아요. 그 빛도, 아름다움도 모든 것이 말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요. 그렇기에 아름다운 거랍니다!”


에이치는 크게 웃었다. 왜인지 따라 웃을 분위기가 아니라서 와타루는 희극적인 미소를 띤 얼굴 그대로 에이치를 바라보면서 반쯤 굳어 있었다. 한참을 웃던 에이치는 웃음기가 남아 예쁘게 휜 눈으로 와타루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새벽빛과 같은 색이었나, 찰나의 순간 지나가고 마는 그 덧없는 빛과 닮아 있었나...


“낭만이 없구나, 와타루.”

“이런! 이 히비키 와타루, 언제나 사랑과 낭만을 좇는 자랍니다. 폐하께 그렇게 보였다면 그야말로 유감이로군요. 아아, 이렇게 슬플 데가!”


언제나와 같이 과장된 연극조의 언어가 쏟아져 나왔다. 말이라기보다는 대사에 가까운, 그 문장을 토해내는 와타루의 입매가 조금 일그러져 있음은 와타루 본인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별은 나보다는 오래 남아있지 않을까? 아마 내가 죽어도, 와타루가 사라져도, 어쩌면 적어도 와타루가 나를 잊을 때까지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거야.”



(중략)



“너를 사랑하고 있어, 나의 와타루.”


히비키 와타루는 그 순간 가면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에이치는 언젠가 와타루가 그랬듯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거짓 웃음을 지으면서 와타루의 뺨을 천천히 손으로 감쌌다.


“놀랐니?”


에이치는 그 한 마디로 허공을 유영하던 와타루의 정신에 찬 물을 들이부었다. 와타루가 갑작스레 혼란에서 깨어났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깨어진 가면을 허겁지겁 주워 들고 평소처럼 웃었다.


“AMAZING!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황제 폐하! 당신은 언제나 절 놀라게 하는군요. 맞습니다, 전 황제 폐하의 기행에 오늘 겪었던 어떤 일보다도 놀라고 말았답니다!”


하지만 비둘기는 날개를 푸드덕대며 날아가는 게 아니라 와타루의 주변에서 작은 머리를 움직이고만 있었다. 장미꽃 잎들도 폭죽처럼 터져야 했는데 반쯤 터지다 말아서 에이치가 장미꽃 잎을 온통 뒤집어쓰고 말았다. 와타루의 가면 조각들은 다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평소답지 않은 그의 실책을 본 에이치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치의 몸이 잘게 떨리자 그의 온 몸에 붙어 있던 붉은 꽃잎들이 하늘하늘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붉은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아아, 맞아. 와타루가 이렇게 놀라는 걸 보는 건 서커스 때 이후로 처음이네. 언제나 날 놀라게 하는 건 와타루였는데, 와타루를 놀라게 하는 것도 꽤 재미있는 것 같아. 와타루는 이런 기분이었구나.”

Posted by 타니님 :

파이로+크라피카 / 도서관

2017. 8. 24. 03:55 from

도서관은 넓고, 또 조용했다. 주위를 둘러 보아도 사람이 얼마 없었다. 도서관이 어찌나 컸던지, 거대하다 못해 웅장하고 또 엄숙한 느낌마저 드는 이 공간에 기가 눌려 사람들이 버티지 못하고 도망간 게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헌터 협회라고 하면 흔히들 머리에 든 것 없이 싸움밖에 할 줄 모르는, 일명 '근육뇌'들이 몰려 있는 곳이라고 상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 뼛속까지 무골인 이들만 모여 있었다면 헌터 협회는 진작에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조직의 몸집이 일정 이상의 크기가 되면 그 때부터는 억지나 폭력, 혹은 정만으로 이끌고 나갈 수는 없는 법이다. 당장 현재의 회장도 다른 직업은 의사에 변호사, 게다가 외양만으로는 헌터라고 쉽사리 상상하기 힘든 소녀였으며 이전의 부회장도 뛰어난 머리를 바탕으로 이곳저곳 일을 벌리던 인물이었다. 현재의 십이지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예쁜 소녀의 모습을 한 언어학자, 다소 깡패같이 생겼지만 심성만은 십이지 누구보다 인간적인 의사, 우스꽝스러운 젖소 옷을 입은 주제에 암흑대륙 정벌대 정보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남자. 상식을 깨는 발언이긴 하지만, 애초에 헌터라는 직종 자체가 무인들이 많을 뿐이지 기본적으로는 각계 전문인들의 모임이라는 게 정석이다.


따라서 헌터 협회의 도서관 또한 그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기 위해 각계각층 각 분야의 책을 모조리 쓸어담아 놓은 곳이었다. 평생 가도 다 훑어보지도 못할 거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방대한 양이었다. 양 뿐만이 아니다. 수집을 전문으로 하는 헌터가 있으니 희귀본 또한 만만치 않게 소장하고 있었다. 모든 분야의 모든 지식을 담은 곳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개중에는 정말로 소위 '근육뇌'들도 많았다. 말하자면 지식인들보다 많았다. 책이라면 학을 떼고 도서관 그림자조차 밟지 않으려 저 멀리 돌아가는 이들이 있었다. 협회에서 도서관에 그런 큰 투자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파이로는 불행인지 행운인지 책을 꽤 좋아하는 부류에 속했다. 도서관의 다소 엄숙한 분위기마저 즐길 수 있는 천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 거대한 도서관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파이로는 미세하게 기분이 들떴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온통 책이 쌓여 있어서 무엇부터 봐야 할지 고민이 되었지만 그것마저 기뻤다. 길게 줄지어진 책장을 따라 걷다 보니 시선이 닿는 곳마다 책이라서 시선을 조금 높였다. 그리고 멍하게 감탄했다. 세상에. 도서관 건물이 높은 건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높은 천장 끝까지 아슬아슬하게 책이 쌓여 있었다. 파이로는 그대로 몇 걸음 걸었다. 그곳만 딱히 높이 쌓인 것이 아니었다. 어딜 가나 모두 높았다. 파이로는 정렬된 책을 손으로 훑으며 멍하니, 그리고 홀린 것처럼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모퉁이를 돌자마자 파이로는 무언가에 부딪쳤다. 시선을 내리니 책이었다. 한때는 반듯하게 쌓여 있었을 책들은 이제 마치 계단처럼 줄지어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우연치곤 꽤 장관이었다. 그러나 파이로는 한가롭게 그것을 감상하고 있을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었고, 쓰러진 책들 옆에는 또다른 책 더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 책 더미 옆에는 한참 책을 정리하던 중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표지가 가죽으로 된 책을 한 손에 들고 쓰러진 책 쪽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만저만 실례가 아니었다. 저 책을 쌓아 놓는 일도 꽤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고의가 아니었다고는 해도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책 더미를 발로 차서 무너뜨려 버렸다. 그 사람이 화가 나서 파이로가 책에게 했던 것처럼 파이로의 정강이를 차 버려도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파이로에겐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단지 들고 있던 책을 다른 책 더미에 올려놓더니 파이로가 무너뜨린 책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파이로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허둥대면서 그를 도왔다. 좀처럼 손발이 맞지 않아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얼마 뒤에는 책 더미가 원상복구되었다. 그리고 그는 맨 위에 있는 책을 집어들고 파이로가 나타났던 모퉁이로 사라져 버렸다. 남겨진 책 더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경황이 없어 지금껏 몰랐지만 그의 머리카락은 오후의 햇살처럼 반짝이는 금발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 정도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더라? 길게 꼬리를 끌며 모퉁이로 사라진 금발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잔상은 너무 강렬했다.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짙은 잔상이었다.

Posted by 타니님 :

최애캐

2017. 8. 21. 23:55 from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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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타니님 :